
이 칼럼은 지난 8월 11일 후견신탁연구센터에서 주최한 공동학술대회 ‘우리의 인권을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자’에서 필자가 발제했던 것을 매체 특성에 맞게 다시 정리해서 보낸 원고이다.
후견신탁연구센터 공동학술대회 ‘우리의 인권을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자’에 좋은 기회를 얻어 패널로 참여하게 되었다. 회장에서 자료집을 받아들고 천천히 살펴보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건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바로 화성시 정신장애인 면접 차별 사건이었다. 정신장애인 A씨가 장애 전형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 받아 유일한 합격자가 되었으나, 면접에서 정신장애에 관한 질문을 받고 미흡 등급을 받아 탈락한 사건이었다. 1심은 원고 패소, 2심에서는 이를 뒤집어 원고가 승소하였으나 화성시에서는 다시 항소한 상태이다.
나는 의문이 떠올랐다. 면접에서 정신장애에 대한 질문을 물어보고 솔직하게 답하니 탈락시켰다면 장애차별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정신장애 특성으로 인해 특별히 더 긴장해서 면접을 망쳤다면, 혹은 적성검사에서 비정상적인 결과를 받아서 좋지 못한 피드백을 받았다면? 그래서 최종적으로 탈락 통지를 받았다면 장애차별인 것인가, 아닌 것인가?
장애가 인간이 정의한 개념이듯이 장애차별 개념 역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장애차별이라고 여기는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무엇을 장애차별이라고 인지하고 무엇을 차별이 아니라고 인지하는 것인가? 개념의 정의와 의미가 변하면 문제인식이 달라진다.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문제로써 새롭게 인식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능력주의를 지적하고 싶다. 장애를 직접적인 이유로 들어 면접에서 탈락시키면 장애차별임이 명확하지만, 장애로 인한 무능력이 드러나 탈락하는 경우는 아무도 장애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탈락한 당사자의 업무 능력이 실제로는 높은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무능력자로 한번 인지된 순간 합법적인 차별의 늪으로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사회가 장애차별을 바라보는 시선은 능력주의에 기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애차별이 장애차별로 인정받으려면 장애정도 판정 사실이 있더라도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정신질환자의 자격 취득 제한의 예외 조항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장애인만 직원으로 받아주겠다는 것을 내포한다.
다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능력주의와 증명. 능력을 평가받고 증명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지 않은가? 기초수급자인 미등록 경증 장애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거치는 근로능력평가가 그것이다. 이것은 취업 면접과는 반대로 무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무능력을 증명하면 복지혜택을 받는 대신 공공일자리 등의 사업에 참여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것들을 장애차별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무능력을 규정하고 제한과 불이익을 가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장애인은 기본적으로 능력에 어느 정도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장애를 직접적으로 거명하며 차별하는 것과, 무능력을 규정하여 차별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최근 정신질환 관련 강력범죄가 이슈로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속된 말로 ‘도태된 사람’이, 백수가, 친구가 없는 사람이, 애인이 없는 사람이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들은 대부분의 정신장애인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필자는 신경다양성 당사자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가끔 신경다양성을 검색하면 자조능력과 자기변호 능력이 떨어지는 일부 정신장애인과 자폐인이 무슨 신경다양성이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다름은 다양성이 될 수 있지만 ‘무능력’은 다양성이 될 수 없다. 다름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니지만, ‘무능력’은 틀린 것이다. 이것이 무능력자와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다.
우리는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능력주의, 에이블리즘을 없애지 않는 이상 장애차별은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어가며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약하고 작고 보잘것없고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학력이 높지 않은 당사자를 포용해야만 한다.
당사자단체의 사업을 수행하고 동료상담가 양성과정을 이수할 능력이 있는 당사자만을 당사자주의에 포섭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애와 무능력을 배제하지 않고 다양성으로 인정할 때 장애인의 사회적 포용이 시작될 것이다. 결국 장애학의 새로운 미래는 신경다양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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